삶을 담는 영민한 틀, 집 (2022.1)

삶을 담는 영민한 틀, 집

취재 한성옥, 최지은, 이상진

집을 볼 때 넉넉한 수납공간을 1순위로 두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수납은 주거에서 늘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요즘 수납공간이 기능을 넘어 더 확장된 역할을 부여받아 흥미롭다. 

물품을 보관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공간의 아이콘으로 활약하는 수납공간을 만나보자.

오랫동안 주거 트렌드를 장악했던 미니멀리즘이 맥시멀리즘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강렬한 색채, 형형색색의 패턴으로 공간을 꾸밀 뿐 아니라 비우는 데 집중했던 미니멀리즘과 정반대로 집 안에 온갖 물건을 가득 채우는 클러터코어가 트렌드로 부상할 정도다. 클러터코어는 집이 일상을 꾸리고 휴식하는 공간에서 나를 표현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취향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집에 자기만의 안목으로 모은 오브제와 수집품을 집성해 편집숍이나 박물관처럼 연출하는 것이다. 경험을 중시하고 여가를 즐기는 MZ세대가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는 점도 집을 살찌우는 데 일조하며, 팬데믹을 계기로 외부 활동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홈 트레이닝을 할 때 사용하는 운동 기구, 홈 오피스에 필요한 사무용품, 홈 바를 위한 술잔 등 하나의 활동이 유입될 때마다 다양한 장비와 물품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을 풍족하게 채우다 보면 자연스레 집도 함께 차오른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질 법도 하지만 가끔 이 물건들에는 ‘찬다’ 라는 말보다 ‘쌓인다’ 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주거 면적이 한정된 상황에서 늘어나는 물건들이 버겁게 다가오는 것이다. 삶이 풍성해질수록 나의 안식처는 비좁고 지저분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수납공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수납공간은 집을 계획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지만 요즘처럼 집이 많은 콘텐츠를 수용하는 흐름 속에서는 더욱 깊은 고민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수납공간을 조성할 때는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깔끔한 외관, 틈새 공간의 활용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수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단순히 물건을 보관하는 기능 외에 색다른 역할을 부여할 수도 있다. 벽이나 바닥의 볼륨을 키워 수납장으로 활용하면 가용 면적을 축소함으로써 오히려 거주자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결과를 불러오고, 수납공간을 벽이나 상자 형태로 확장해 공간 구조를 획기적으로 재편하기도 한다. 수납공간을 숨기는 대신 물건을 강조하는 형태로 드러내 갤러리처럼 연출하고 색, 형태, 소재에 대범한 시도를 해 그 자체로 디자인 오브제 역할을 하도록 한다.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차원을 넘어 집의 특색을 이루는 아이콘이 되는 것이다. 때때로 집을 정리하는 일은 일상생활의 흐름을 정돈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물건마다 아늑한 제자리를 마련해주며 풍경까지 가다듬는 수납공간을 조성하는 동안 삶도 호흡을 고르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갈 것이다.



수납으로 정돈한 생활 공간
Floating Plateau

Design / SIM-PLEX
Location / Wings At Sea, Tseung Kwan O, Hong Kong
Area / 46.82㎡
Photograph / Patrick Lam

How to Design  벽과 바닥 곳곳에 과감하게 수납장을 설치하고 가구와 연결해 생활 공간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수납은 항상 좁은 주거의 고민거리다.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일정량의 짐이 필수적인데 집의 면적이 좁아질수록, 함께하는 식구가 많아질수록 필요한 물건을 정리하고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기던 수납장을 당당히 드러내고 생활공간과 연결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홍콩의 Floating Plateau는 3인 가구와 입주 가정부가 협소한 집에서 공존하고자 수납장을 벽과 바닥에 과감하게 배치한 프로젝트다. 특히 각 수납장에 단순한 물건 보관의 역할을 뛰어넘어 침대와 벤치, 책상 등 일반 가구 역할까지 부여했으며 높은 층고를 나누어 별도의 독립 영역이 없었던 가정부에게도 개인 공간을 보장할 수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한쪽 벽면을 채운 키 큰 장과 그 위의 침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키 큰 장은 텔레비전과 식탁용 벤치를 양 끝에 설치해 거실과 다이닝 룸 기능을 더했는데 슬라이딩 도어로 필요한 영역만 선택적으로 개방할 수 있게끔 설계했다. 슬라이딩 도어는 텔레비전 좌측으로 마련된 개구부를 막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데 일과가 끝난 저녁에 문을 닫으면 가정부에게 편안한 휴식 시간을 제공한다. 오른쪽 끝에는 침대로 이어지는 수납 계단을 설치하고 가정부 전용 수납공간으로 활용해 가정부가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누리도록 했다. 

안쪽의 가족 영역으로 들어서면 짙은 목재가 돋보이는 안방이 나타나는데 침실과 서재의 기능이 집약된 가구를 짜 넣어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도왔다. 바닥 전체에 어두운 월넛 벙커형 수납장을 설치하고 침대프레임 끝을 확장해 책상과 연결함으로써 가장 안쪽은 침실로, 바깥쪽은 서재로 이용했다. 아이 방은 거실과 같이 벙커 침대를 두되 침대 아래쪽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비워두었다.



옷장에서 찾은 미학
Flat|2

Design / unnamed studio
Location / Rostov-on-Don, Russia
Area / 46㎡

How to Design  침실 안의 벽 한 면을 채운 옷장 표면을 쿠션처럼 연출해 입체적인 공간감을 주었다.

수납장은 효율성에 집중한 요소이기에 아름답게 매만지기보다는 작은 틈새나 문 뒤에 숨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밋밋해 보이는 수납장도 형태나 컬러에 변화를 주면 숨겨진 조형미를 부각하며 시각적 포인트가 된다. 러시아의 Flat|2는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수납공간을 디자인 요소로 다듬어 주목할만하다. 1인 가구인 거주자는 집이 편리하면서 다양한 활동의 무대가 되기를 바랐다. 디자이너는 작은 공간을 짜임새 있게 분할한 후 집 안 곳곳에서 책을 읽거나 휴식과 명상을 할 수 있게 했다. 여러 공간에서 편한 시간을 보내도록 내부를 넉넉하게 구획했는데, 수납공간을 다양한 영역에 배치하고 통통 튀는 모습으로 다듬어 유니크한 감각을 표현했다. 

내부는 거실, 주방 영역과 침실, 작업 영역으로 구분된다. 먼저 우윳빛 유리로 만든 상자 모양 침실은 한쪽 벽에 쿠션으로 감싼 옷장을 채워 수납 기능을 미학 요소로 승화하면서 이색적인 볼륨감을 형성했다. 옷장은 아이보리색 쿠션이 격자 모양으로 나열된 형태로 패브릭을 작은 정사각형으로 꿰매 폭신함을 강조했으며 내부는 면을 반듯하게 가다듬고 푸른색으로 변화를 주어 시각적 재미를 더했다. 정사각형 모듈은 침대 헤드 보드와 연결돼 수면 공간이 더욱 포근하게 둘러싸인 느낌을 선사한다. 

한편 거실도 수납장 컬러로 포인트를 주어 화려한 인상을 전했다. 한쪽 벽을 분홍색 책장으로 가득 채워 다양한 물건을 수납하게 했으며 맞은편에도 같은 색 수납장을 두어 통일성을 부여했다. 또한 주방의 수납장과 수전에 비비드한 파란색을 입히고 화장실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해 활력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풍경에 녹아든 삶의 기능
Appartamento sui Navigli

Design / AACM
Location / Milano, Italia
Area / 28㎡
Photograph / Maria Francesca Lui

How to Design  거실과 침실을 가르는 벽 양쪽에 주방과 의류에 관한 수납공간을 장착해 기능 공간을 창출했다.

집은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기에 면적에 상관없이 생략할 수 없는 기능들이 있다. 수면, 식사, 빨래 등의 활동을 모두 포용하면서 일상을 정돈하기 위해서는 좁은 집에서조차 최대한 벽을 세워 거실, 침실, 주방 등으로 실을 구획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면적을 쪼개다 보면 자칫 집이 더 협소하고 답답해 보이며 수납공간조차 제 역할을 못해 지저분해지기 쉽다. 밀라노의 Appartamento sui Navigli는 구역을 분절하는 대신 단순한 구조를 유지하면서 벽의 볼륨을 부풀리고 수납 역할을 부여한 프로젝트로 발상의 전환을 통해 개방감 있는 공간과 충분한 생활 기능을 양립시킨 점이 돋보인다.

사업가인 거주자는 바빠서 하루의 대부분을 외부에서 보내지만 그 대신 집에서만큼은 대도시의 번잡함을 모두 잊고 온전히 쉴 수 있기를 바랐다. 이에 디자이너는 구획을 최소화해 내부를 현관, 거실, 침실, 욕실로만 구성하고 담백하고 정제된 디자인을 펼쳐 평온함을 전하고자 했다. 다만 집을 거실과 침실로 양분하는 벽에 두터운 구조체를 더하고 양쪽에 각각 요리와 의류 관련 수납 기능을 부여해 별도의 면적을 할애하지 않으면서 주방과 드레스 룸을 마련했다. 거실 방면의 구조체는 조리 공간을 중심으로 그릇장과 가전 수납장 등을 갖추었으며, 침실 쪽은 옷장과 함께 세탁기, 건조기 자리도 마련해 세탁실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구조체의 기능뿐 아니라 디자인도 눈여겨볼 만하다. 현관에서 시작한 구조체가 벽을 끼고 돌아 욕실까지 이어지면서 집 중앙을 묶어주며, 검은색 구조체가 하얀색과 목재로 이루어져 가볍고 밝은 집의 기운을 지그시 눌러주어 균형을 잡는 것이다. 더불어 현관, 침실 출입구, 욕실 출입구 등 구역 간 경계마다 밀라노의 두오모 등에서 자주 보이는 뾰족한 첨두 아치 모양을 적용함으로써 시의 맥락을 끌어들이면서 공간에 운율감을 불어넣은 점도 매력적이다.



벽이 된 수납장
The Green Box

Design / Ester Bruzkus Architekten
Location / Berlin, Germany
Area / 120㎡
Photograph / Robert Rieger

How to Design 수납장을 벽으로 확장한 뒤 각 면에 서로 다른 기능을 담아 공간을 자유롭고 유연하게 구획했다.

대부분의 주거에서 수납 가구는 벽을 따라 배치된다. 목적에 따라 나뉜 공간에 맞게 물품을 보관하면서도 주어진 면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용이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형적인 공간감 대신 유연하게 흐르는 공간을 의도해보고 싶다면 벽의 기능을 수납 가구로 대신해보자. The Green Box는 3면을 감싼 통창의 개방감을 극대화하고자 수납장을 벽처럼 활용함으로써 구조를 참신하게 정의한 프로젝트다. 내력벽을 제외한 모든 벽체를 제거한 뒤 중앙에 긴 직사각 상자 형태의 수납장만 배치해 네 개의 공간이 생겨났는데 사면을 거실, 주방, 침실, 욕실로 꾸몄다. 또한 전체를 짙은 녹색으로 칠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간감을 완성했다. 먼저 현관과 마주 보는 면에는 책꽂이를 만들어 벽난로와 함께 느긋한 독서를 즐기는 거실을 조성했다. 책꽂이를 따라 돌아가면 직사각형의 긴 면에 해당하는 주방이 드러나는데 면을 안으로 밀어 ㄷ 자로 움푹 들어간 공간에 아일랜드 장을 추가 설치해 전체 조리 및 식사 공간을 수납장이 감싼 형태를 만들었다. 

가장 안쪽에는 개인적인 공간인 침실을 두고 수납을 덜어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이어지는 욕실에는 양옆으로 캐비닛을 설치해 충분한 수납공간을 확보했다. 욕실은 거실과도 연결되는데 긴 욕실을 반으로 나눠 침실에 가까운 쪽에는 거주자 부부를 위해 2구 세면대와 욕조를, 거실에 가까운 쪽에는 1구짜리 세면대를 두어 손님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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